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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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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사카 사건은 1885년 12월 오사카에서 자유민권운동의 격화로 발생한 사건으로, 자유당 좌파가 조선 내정 개혁을 목표로 계획했다. 자유당 내 김옥균 등 독립당을 지원하는 움직임과 별개로, 오이 겐타로 등은 조선 인민의 독립 투쟁과 일본 자유민권 운동을 결합하려 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등을 지원하여 조선에 입헌 체제를 수립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키려 했으나, 이소야마의 배신으로 계획이 발각되어 139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주동자들은 처벌받았으며, 후쿠다 에이코는 이 사건을 국권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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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사건
사건 개요
명칭오사카 사건
발생 시기1885년
관련 인물오이 겐타로, 고노 히로나카, 다케우치 쓰나, 이나가키 시게미 등
원인자유민권운동의 과격화, 정부의 탄압
목적정부 전복
대동단결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돕고 일본의 국권 회복
전개 과정오사카를 거점으로 무력 봉기 계획, 자금 및 무기 조달 시도, 밀고로 발각
결과주동자 체포 및 처벌, 자유민권운동 쇠퇴 가속화
배경
시대적 배경메이지 시대, 자유민권운동의 확산 및 과격화
사회적 배경농민 봉기, 사회 불안,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사상적 배경루소의 사회계약론, 자유주의, 국수주의
주요 인물
오이 겐타로사건의 주모자, 급진적인 자유 민권 운동가
고노 히로나카자유당 지도자, 오이 겐타로와 협력
다케우치 쓰나자유당의 이론가, 오이 겐타로의 사상적 지지자
이나가키 시게미자유당의 활동가, 오이 겐타로와 함께 거사 계획
사건의 전개
거사 계획오사카를 거점으로 무력 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고자 함.
자금 조달각지를 돌아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려 함.
발각 및 체포내부 고발로 인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체포됨.
재판과 처벌오이 겐타로 등 주동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음.
영향
정치적 영향자유민권운동의 쇠퇴를 가속화시키고, 정부의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됨.
사회적 영향사회 전반에 걸쳐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됨.
사상적 영향급진적인 자유민권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온건 노선이 대두됨.
평가
긍정적 평가당시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음.
부정적 평가과격한 수단으로 사회 불안을 야기하고, 자유민권운동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비판이 있음.
관련 항목
자유민권운동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치 운동
오이 겐타로오사카 사건의 주모자
고노 히로나카자유당 지도자

2. 배경

이 사건은 1885년 12월 오사카에서 일어난 자유민권운동의 격화 사건 중 하나로, 자유당 좌파가 계획한 조선 내정 개혁 운동이다[1]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 문제가 복잡해짐과 동시에, 자유당 수뇌부도 이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특히 독립당김옥균 등을 지원하는 태도를 취했다[1]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오이 겐타로 등은 조선 인민에 의한 독립 투쟁과 일본 국내의 자유민권 운동을 결합하여 양국에 걸친 일종의 민주주의 혁명을 목표로 했다[1]。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조선의 정세' 및 '일본 자유민권운동의 전개' 참조)

2. 1. 조선의 정세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 문제가 복잡해졌다. 자유당 수뇌부는 김옥균을 비롯한 독립당을 지원했다.[1] 1884년 고토 쇼지로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프랑스 공사에게 자금을 요청하여 조선 궁정 개혁 운동을 시도했다.[1] 그러나 일본 정부가 먼저 독립당 인사의 쿠데타를 지원했고, 이 쿠데타는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했다. (갑신정변)[1]

오이 겐타로 등 자유당 좌파 활동가들은 자유당 수뇌부나 일본 정부의 조선 내정 개혁책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이들은 조선 인민의 독립 투쟁과 일본 국내의 자유민권운동을 결합하여 양국에 걸친 민주주의 혁명을 목표로 했다.[1] 오이 겐타로를 중심으로 경산 에이코, 고바야시 기쿠오, 이소야마 세이베, 아라이 쇼고, 이나가키 시메스 등 구 자유당 일부는 동지들과 함께 한반도로 건너가 쿠데타를 일으켜 사대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독립당 정권을 세우려 했다.[1] 이들은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등을 지원하여 조선에 입헌 체제를 구축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2] 일본 국내 자유민권운동이 정부 탄압으로 어려워지자, 해외로 진출하여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고 국내 개혁을 도모하려 했다.[1]

2. 2. 일본 자유민권운동의 전개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 문제가 복잡해지자, 자유당 수뇌부도 이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독립당김옥균 등을 지원하는 태도를 취했다.[1] 1884년 고토 쇼지로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프랑스 공사에게 자금을 요청하여 조선 궁정 개혁 운동에 착수하려 했다.[1]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움직임을 감지하고 선수쳐 독립당 인사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좌절되었다 (갑신정변).[1]

자유당 좌파 활동가였던 오이 겐타로 등은 자유당 수뇌부나 일본 정부의 조선 내정 개혁책과는 다른 입장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조선 인민의 독립 투쟁과 일본 국내 자유민권 운동을 결합하여 양국에 걸친 민주주의 혁명을 목표로 했다.[1] 오이 겐타로를 중심으로 경산 에이코, 고바야시 기쿠오, 이소야마 세이베, 아라이 쇼고, 이나가키 시메스 등 구 자유당 일부는 동지들을 이끌고 한반도로 건너가 쿠데타를 일으켜 사대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독립당 정권을 세우려 했다.[1] 이들은 갑신정변에서 실패한 김옥균 등을 지원하여 조선에 입헌 체제를 구축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2] 국내 자유민권 운동이 정부 탄압으로 막히자, 해외로 진출하여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고 국내 개혁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1]

폭탄을 제조하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강도 행위도 벌어졌지만, 이소야마의 변심으로 실행 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139명이 체포되었다.[1] 고바야시, 이소야마는 외환죄로 경금고 6년형을 받았고, 아마노 마사타츠 등 많은 사람들에게 형벌이 주어졌다. 쿠데타 계획 중심 인물인 오이와 조선 도항 부대 책임자 아라이는 중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 1887년 오사카시 텐노지구 수법사에서 오사카 사건 관계자 위령제가 열렸고, 1889년 2월 대일본제국헌법 발포에 따른 사면으로 오이 등은 석방되었다.[3] 경산 에이코의 저서 『첩의 반생애』에는 이때 수감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4] 훗날 사회주의자가 된 에이코는 이 사건을 회상하며 너무나 국권주의적이었다고 비판했다.[1] 이나가키 시메스는 입옥 중 지은 단가 300수를 묶어 『협의집』으로 간행했다.

기타무라 도코쿠는 젊은 시절 자유민권 운동에 참가했으나, 이 계획의 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 행위에 갈등하여 운동을 이탈했다. 하지만 나중에 발표한 장시 "초수지시"에는 이 사건의 그림자가 있다고 전해진다.

3. 사건의 전개

1885년 자유민권운동이 격화되던 중, 자유당 좌파는 오사카에서 조선 내정 개혁 운동을 계획했다.[1]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 문제가 복잡해지자, 자유당 수뇌부는 독립당 김옥균 등을 지원했다.[1] 1884년 고토 쇼지로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프랑스 공사에게 자금을 요청하여 조선 궁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일본 정부가 먼저 갑신정변을 지원하면서 청나라 개입으로 실패했다.[1]

오이 겐타로 등 자유당 좌파 활동가들은 일본 정부와 다른 노선을 추구하며, 조선 인민의 독립 투쟁과 일본 내 자유민권 운동을 결합하여 양국에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다.[1] 오이 겐타로, 경산 에이코, 고바야시 기쿠오, 이소야마 세이베, 아라이 쇼고, 이나가키 시메스 등은 한반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사대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독립당 정권을 세우려 했다.[1] 이들은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등을 지원하여 조선에 입헌 체제를 구축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2]

이를 위해 폭탄을 제조하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강도 행위까지 계획했지만, 이소야마 세이베의 변심으로 실행 전에 발각되어 139명이 체포되었다.[1] 고바야시 기쿠오, 이소야마 세이베는 외환죄로 경금고 6년형, 오이 겐타로와 아라이 쇼고는 중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3] 아마노 마사타츠 등 다른 많은 사람들도 형벌을 받았다.[1]

1887년 오사카시 텐노지구 수법사에서 오사카 사건 관계자 위령제가 열렸고,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 발포에 따른 사면으로 오이 겐타로 등은 석방되었다.[3] 후쿠다 에이코는 저서 『첩의 반생애』에 수감 상황을 묘사했고,[4] 훗날 사회주의자가 된 에이코는 이 사건을 국권주의적이었다고 비판했다.[1] 이나가키 시메스는 옥중에서 지은 단가 300수를 묶어 『협의집』을 간행했다.

자유민권 운동에 참가했던 기타무라 도코쿠는 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 행위에 가담하라는 유혹에 고민하다 운동을 이탈했다. 훗날 발표한 장시 "초수지시"에는 이 사건의 영향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3. 1. 조선 내정 개혁 운동 계획

1885년 12월 오사카에서 자유민권운동이 격화되던 중, 자유당 좌파는 조선의 내정 개혁 운동을 계획했다.[1]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 문제가 복잡해지자 자유당 수뇌부는 김옥균독립당을 지원했다.[1] 1884년 고토 쇼지로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프랑스 공사에게 자금을 요청하여 조선 궁정 개혁 운동을 시도했으나, 일본 정부가 먼저 독립당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했다(갑신정변).[1]

자유당 좌파 활동가 오이 겐타로 등은 일본 정부의 조선 내정 개혁책과는 다른 입장에서, 조선 인민의 독립 투쟁과 일본 내 자유민권 운동을 결합하여 양국에 민주주의 혁명을 목표로 했다.[1] 오이 겐타로, 경산 에이코, 고바야시 기쿠오, 이소야마 세이베, 아라이 쇼고, 이나가키 시메스 등 구 자유당 일부는 동지들과 한반도로 건너가 쿠데타로 사대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독립당 정권을 세우려 했다.[1] 이들은 갑신정변에서 실패한 김옥균 등을 지원하여 조선에 입헌 체제를 구축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2] 일본 내 자유민권 운동이 정부 탄압으로 어려워지자, 해외에서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고 국내 개혁을 도모하려 했다.[1]

3. 2. 자금 조달 및 폭탄 제조

1885년 오사카 사건 주동자들은 조선 내정 개혁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 행위까지 계획하였다.[1] 이는 자유민권운동의 과격한 방법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는다. 오이 겐타로를 중심으로 경산 에이코, 고바야시 기쿠오, 이소야마 세이베, 아라이 쇼고, 이나가키 시메스 등 구 자유당 일부는 폭탄을 제조하며 무력 투쟁을 준비했다.[1]

이들은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등을 지원하여 조선에 입헌 체제를 구축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2] 그러나 이소야마의 변심으로 계획은 실행 전에 발각되었고, 139명이 체포되었다.[1]

기타무라 도코쿠는 당시 자유민권 운동에 참여했으나, 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 행위에 가담하라는 유혹에 고민하다가 결국 운동을 이탈했다. 훗날 그는 장시 "초수지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 오사카 사건의 영향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3. 3. 계획 발각과 관련자 체포

1885년 12월, 이소야마 세이베의 변심으로 계획이 실행 전에 발각되어 139명이 체포되었다[1]

고바야시 기쿠오와 이소야마 세이베는 외환죄로 경금고 6년형을 받았고, 아마노 마사타츠 등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형벌이 내려졌다[1]。 쿠데타 계획의 중심 인물인 오이 겐타로와 조선 도항 부대의 책임자가 된 아라이 쇼고는 중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3]

1887년 (메이지 20년), 오사카시 텐노지구에 있는 수법사에서 오사카 사건 관계자 위령제가 열렸다[3]1889년 (메이지 22년) 2월, 대일본제국헌법 발포에 따른 사면으로 오이 겐타로 등은 석방되었다[3]

후쿠다 에이코(경산 에이코)의 저서 『첩의 반생애』에는 이때의 수감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4]

4. 사건의 결과 및 영향

이 사건은 폭탄 제조, 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 행위까지 계획되었으나, 이소야마의 변심으로 실행 전에 발각되어 139명이 체포되었다.[1] 고바야시 기쿠오・이소야마는 외환죄로 경금고 6년형, 아마노 마사타츠 등은 그 외 많은 형벌을 받았다. 쿠데타 계획의 중심 인물인 오이 겐타로와 조선 도항 부대의 책임자가 된 아라이 쇼고는 중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1] 1887년 오사카시 텐노지구 수법사에서 오사카 사건 관계자 위령제가 열렸고,[3]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 발포에 따른 사면으로 오이 겐타로 등은 석방되었다.[3] 후쿠다 에이코(경산 에이코)의 저서 『첩의 반생애』에는 이때의 수감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4]

4. 1. 일본 자유민권운동에 미친 영향

1885년 12월 오사카에서 자유민권운동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자유당 좌파가 조선 내정 개혁을 계획한 사건이다.[1]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일본 내 자유민권 운동은 정부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 이에 자유당 좌파는 해외로 눈을 돌려 조선에서의 혁명을 통해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고 국내 개혁을 도모하려 했다.[1]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형벌을 받았다.[1]1887년 오사카시 텐노지구 수법사에서 오사카 사건 관계자 위령제가 열렸고,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 발포에 따른 사면으로 주동자 오이 겐타로 등은 석방되었다.[3]

이 사건은 자유민권운동이 점차 과격해지는 양상을 보여주며, 이후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에도 영향을 주었다. 후쿠다 에이코(경산 에이코)는 훗날 이 사건을 국권주의적이었다고 비판했다.[1]

기타무라 도코쿠는 자유민권 운동에 참가했으나, 오사카 사건의 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 행위에 가담하라는 유혹을 받고 고민 끝에 운동을 이탈했다. 훗날 발표한 장시 "초수지시"에는 이 사건의 영향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4. 2. 조선에 미친 영향

1885년 오사카 사건은 자유민권운동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한 사건이었다.[1] 오이 겐타로 등은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등을 지원하여 조선에 입헌 체제를 구축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2] 이들은 조선 인민에 의한 독립 투쟁과 일본 국내의 자유민권 운동을 결합하여 양국에 걸친 민주주의 혁명을 목표로 했다.[1]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 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1] 이후, 이 사건에 가담했던 후쿠다 에이코는 훗날 이 사건을 회상하며 국권주의적이었다고 비판했다.[1]

4. 3. 관련 인물들의 이후 행적

오이 겐타로와 아라이 쇼고는 대일본제국헌법 발포에 따른 사면으로 석방되었다[3]후쿠다 히데코(경산 에이코)는 훗날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이 사건을 회상하며 너무나 국권주의적이었다고 비판했다[1]。고바야시 기쿠오는 외환죄로 경금고 6년형을 선고받았다[1]。이나가키 시메스는 입옥 중에 지은 단가 300수를 묶어 『협의집』을 간행했다. 기타무라 도코쿠는 젊은 시절 자유민권운동에 참가했으나, 오사카 사건의 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 행위에 가담할 뻔 했다가 고민 끝에 운동을 이탈했다.

5. 평가 및 의의

1885년 오사카에서 일어난 자유민권운동의 격화 사건 중 하나인 오사카 사건은, 자유당 좌파가 계획한 조선 내정 개혁 운동이었다.[1] 이 사건은 자유당 수뇌부나 일본 정부의 조선 내정 개혁과는 다른, 조선 인민의 독립 투쟁과 일본 내 자유민권 운동을 결합하려는 시도였다.[1]

오이 겐타로 등은 조선에 입헌 체제를 구축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2] 실행 전 계획이 발각되어 실패했다.[1] 이 사건으로 139명이 체포되었고, 주동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1]

이후 사회주의자가 된 경산 에이코는 이 사건을 회상하며 국권주의적이었다고 비판했다.[1] 한편, 당시 자유민권 운동에 참여했던 기타무라 도코쿠는 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 행위에 갈등하다 운동을 이탈했는데, 그의 장시 "초수지시"에 이 사건의 영향이 있다고 전해진다.

참조

[1] 문서 後藤(1974)p.221
[2] 문서 佐々木(1992)pp.227-229
[3] 문서 1887年の慰霊祭は、この事件で逮捕された福島県出身の加藤宗七が送検前に、群馬県出身の山崎重五郎、長野県出身の土屋市助、茨城県出身の川北虎之助がそれぞれ予審中に病死しており、この4人のためにひらかれたものである。
[4] 문서 景山は旧姓。万朝報記者福田友作と結婚して福田英子となった。大阪事件では爆発物運搬などに協力して投獄された。福田とは3人の子をもうけた。大井憲太郎と内縁関係にあったこと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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